[삶의 전쟁터에서] EP 3_8 믿음을 깨는 행위를 조심하라.

2008/07/1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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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 것은 친구로 지낼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해와 포용이 필요하다.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불특정한 만남을 통해서도 우정이란 이름으로 대변되는 원만한 관계 유지가 가능하다지만,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일상을 공유하는 관계라는 특성 때문에 서로 간에 갈등 상태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가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핸디캡을 가진다. 그것은 마치 신혼부부가 연예 때와는 다르게 서로 몰랐던 습관과 사상의 차이로 인해 잦은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대게 그런 다툼은 사소한 문제에서 출발한다.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지 끝에서부터 짜는지, 변기 뚜껑을 열어놓는지 닫아놓는지, 머리를 하루 한 번 감는지 이틀에 한 번 감는지, 뉴스를 좋아하는지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등등 나열해보면 끝없이 많은 갈등의 연속이다.

친구와 일을 같이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이프 소리가 큰지 작은지, 매일 출근 때 칼 출근을 하는지 10분 20분 지각을 하는지, 한 번에 한 가지씩 일을 처리하는지 한꺼번에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는지,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는지 정해진 단계를 밟아 순차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는지, M100을 좋아하는지 Y100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하는지,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일을 할 때 주위를 정리해가며 작업하는지 어지럽게 늘어놓고 작업을 하는지, 잠을 많이 자는지 적게 자는지 등 우리 모두 그런 것들을 체크해 보면 정말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은 되지 않을까? 그런 내재된 분란의 요소들은 언제나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디자인 업무의 톱니바퀴에 순간적인 정전 상태를 만든다. 아니 때로는 정지해버리거나 해체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것을 자신의 수고를 더해 퓨즈를 갈거나 부품을 교체하거나 재조립하지 않으면 물과 기름처럼 영원히 결합될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인생선배들은 이야기한다. 친구를 잃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동업을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우린 늘 이상적 성공을 목표로 둔다. 둘이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시너지에 대해서만 입을 모아 떠든다.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예 함께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터, 이것은 이제 막 결혼을 마친 신혼부부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LG나 Google의 사례처럼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그러한 성공적 파트너가 되어 주길 원할 것이다. 대의를 향한 공통적 목표는 늘 공고히 유지된다. 목표, 이상적인 것을 위해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내거나 디자인 철학이나 사상을 공유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태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작은  달이 태양을 온전히 가려버리는 개기일식처럼 동업의 관계 속에서 아주 작은 분란들이 결국 ‘이상’이라는 태양을 가려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K와 나에게도 생각보다 빨리 크고 작은 분란들이 생겨났다. 우리 서로가 가진 장, 단점을 충분히 공유했었고, 그것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나름 이러한 고민의 결과가 차별화된 기획과 디자인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예전 일기장에도 썼지만 분란의 씨앗은 일상의 공유를 통해 나타나는 ‘익숙해짐’이었다. K는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새로운 디자인 트렌드에 대한 수용력이 뛰어났고, 원만한 성격으로 인한 대인관계의 폭도 넓었다. 또한 설득에 관한 한 능수능란했고, 디자인에 있어서는 완벽주의 성격까지 갖춘 그야말로 비즈니스맨형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그에 반해 나는 소극적인 편인데다가 대인관계도 넓지 못했고, 트렌드를 수용하는 노력 또한 부족했으며,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했다. 편집디자인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서로간의 ‘익숙해짐’은 나의 이러한 단점들을 극복하는데 하나의 장애물이 되었다.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요구치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일을 하는 데에는 더 없이 중요했다. 아마도 초창기에는 대학생 때와는 달라진 나의 나약함에 K는 아마도 실망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난 디자인보다는 기획과 카피에 강했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누구나 인정할만한 괜찮은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K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물론 K의 빠르고 적극적인 부분에 내가 보조를 맞추어주길 바라는 약간은 일방적 기준도 작용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러한 K의 진취적인 부분은 여러모로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느리더라도 차분히 진행하자는 나의 의견은 언제나 힘을 잃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소스만 던져주면 디자인이 뚝딱 나올 것이라는 클라이언트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긴 했다. 그리고 시간이 많다고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디자인계의 정설 아닌 정설도 있었다. 얼마 주어지지 않은 시간을 쪼개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자는 것이었다. 이해는 쉬웠지만 실천은 힘들었다. 오랜 세월 쌓여진 체질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저돌적인 K의 성격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내가 위축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말하고 싶었으나 왠지 핑계 같아 그만두었다. 아마도 내가 K보다 한 살이 많다는 이유도 작용을 했을 터이고, 경험이 많은 K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나의 수동적 자세도 작용했을 것이다. K는 동생이지만 배울 것이 많으니 일단은 많은 작업을 해보면서 실무를 배워보자는 의도도 있었다. 이러한 많은 요소들이 점차 발전되지 않고 굳어지면서 잠재된 문제점들은 점차 우리 둘 사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몇 가지 분란의 사례를 들어본다.

1.
K와 나는 디자이너의 불규칙한 생활 때문에 피폐해진 육체를 보살피고자 근처 한남휘트니스센터에 헬스클럽 3개월 권을 구매했다. 두 명이 3개월이면 많은 할인 혜택이 주어지는 상품이었다. 이 상품에는 스쿼시, 요가 등 부가 종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과감하게 격렬하기로 소문난 스쿼시를 선택했다. 한동안 우리는 열심히 다녔다. K는 살을 빼기 위해 유산소운동을 중심으로, 나는 근력을 위해 웨이트 중심으로 트레이너가 프로그램을 짜주었고, 일주일에 세 번은 헬스, 세 번은 스쿼시, 그리고 일요일은 휴식을 취하는 스케줄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해서 강철 체력을 만들자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운동을 했다. 운동 후의 달콤한 식사도 좋았고 불면증에 시달리던 우리에게 곤한 잠을 선사하기도 했으니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우리의 목표는 달성되는 듯 했다. 하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은 사치일까? K는 수완이 좋아 많은 일들을 끌어들였고, 우리는 매일매일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했다. 우리는 매일 2시간의 운동시간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서로간의 무언의 합의라도 있었는지 운동 시작 보름 후부터 운동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나질 안았고, 잠이 부족했으며, 운동 후 쏟아질 피로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에 대한 의지의 부족이었다. K가 말했다. “난 내가 나가지 않으면 형이 나를 억지로라도 끌고 갈 줄 알았는데, 안 그러네? 이 양반 원래 그런 것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사람 아니었나? 그래서 3개월용으로 등록한 건데. 나 좀 끌고 가줘” 난 살짝 열이 받아서, “아이고 나도 힘들다. 너 끌고 나갈 힘이 어디 있냐?” 장난처럼 얘기하긴 했지만 서로간에 약간은 실망한 기색이 보였다. 아마 그 때 등장한 말이 ‘의지박약’이었을 것이다.

2.
한국스마트카드 일이 들어왔다. 우리는 밤새도록 일을 처리했다. 오전에는 K와 한 업체간의 미팅이 있었고, 한국스마트카드와는 점심 미팅이었다. 밤을 새고 아침 즈음에 침실에서 잠이 든 나는 갑자기 K의 전화를 받았다. “형 어제 작업한 것, 출력 좀 해서 보드 작업 해줘” 하지만 나의 중대 실수가 벌어졌다. 두 시간 밖에 자지 못한 내가 짜증을 내어버린 것. “뭐? 그거 지금 하라고?” K는 “알았어”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K는 단단히 맘이 상했는지 미팅을 마치고 들어와 홀로 보드작업을 했다. 나는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고 K가 보드작업을 하던 중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퍼뜩 잠에서 깬 나는 뭔가 큰 죄책감이 들었고, 사무실로 나와 오현이 옆에서 말없이 일을 도와줬다.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K는 그것을 들고 다시 미팅을 나갔다. 아 그 냉랭함은 정말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내 실수가 빚은 충돌이었다. 유난히 잠투정이 많은 내 성격 때문이겠지. 그날 밤 난 K와 술 한잔을 기울이며 사과했고, 그런 것들을 마음에 두고 살지 않는 K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다. 다행이었다. 아마도 이 날 이후로 난 참 많은 것이 바뀌었던 것 같다. 나 중심이 아닌 우리 중심으로, 우리 중심이 아닌 클라이언트를 중심으로 패턴을 바꾸게 된 것이다.

3.
좀 나중의 이야기지만 K에게는 투싼(TUCSON)이 한 대 있었다. 그 차를 탄지 일년도 되지 않은 어느 날 그의 앞에 멋진 차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푸조207이었다. 사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사고야 마는 K의 성격상 내가 그 유혹을 뿌리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길을 잘 들인 탓에 무리없이 잘 나가던 투싼을 팔고, 가격도 훨씬 비싼 푸조를 산다는 것이 나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럴려면 K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가져올 터이고, 일에 대한 중압감이 나에게까지 오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스 방식을 통해 K는 결국 그 차를 사고 만다. 책임감이 강한 K는 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려 했다. 그동안 나에게 배려해 준 것도 많이 있어서 나도 그에게 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통이 크게 움직이는 K에 대해 나는 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은 많이 하는데 회사의 잔고는 늘 넉넉하지가 못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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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4 19:35 2008/07/14 19:35

[삶의 전쟁터에서] EP 3_7 자기 것에 대한 눈을 키워라.

2008/07/1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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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AV Walker 이전에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_극단76> 작업을 했었다. A4 판형에 16페이지의 분량이었다. 작업이 어렵지는 않았다. 나중에 작업했던 연극 <갈매기>처럼 대규모의 공연이 아닌 소극장 위주의 저예산 연극이라 오히려 접근하기는 쉬웠다. 싼 값에 대충하려는 의도가 있어 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크리에이티브를 보다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은 안되지만 창작이 보장된 프로젝트. 우리의 디자인 철학과 방향성을 담을 수 있는 좋은 시험대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작업을 마무리 하고, K가 말했다. “이 때까지 만든 것 중에 제일 잘 만들었어요” 하며 웃었다. K의 칭찬의 의도는 이랬다. “내가 안그라픽스에 있을 때, 무서운 사수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은 언제나 내가 만든 작품을 칭찬했어. 나름 힘이 나기도 하고 의욕도 생겨서 다음 작업도 술술 잘 풀리더라고. 근데 몇 주 지나서 내가 만든 걸 보면 그 때 작품이 왜 이리 시시해 보이는지 모르겠더라. 그 때가 되면 그 사수는 당시 작업에 대한 부족한 면을 지적해주고 스스로 고치도록 유도했어. 칭찬과 지적도 타이밍이 어떠냐에 따라 효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거지. 일단은 스스로 자기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눈을 만드는 게 제일 우선인 것 같아.” 내가 만든 것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만드는 일. 그것은 많은 작업을 통해 스스로 깨우쳐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다음 작업에 임하는 의욕과 사기를 북돋아주어 능동적인 작품을 만들어 나가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칭찬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크리에이티브가 점점 더 발전 할 터이고, 결국은 최초의 작품은 그만큼 낮은 수준이란 것을 깨달을 테니까 말이다. 대학교 때 모 교수님은 나즈막하고 침착한 말투로 “인수야 참 잘했는데, 파일은 얼른 삭제하렴.”이라 말했는데, 이처럼 학생의 창작의욕에 비수를 꽂는 교수님과 K의 대처방식은 사뭇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AV Walker를 마치고, 다시 돌아본 그 작품은 너무나도 유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개성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으며, 그냥 정리만 한 수준의 졸작. 처음이라는 말로 핑계 부리기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내 글씨로 도배한 표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지 레이아웃과 폴리오 배치, 자간과 행간, 사진 배열, 타이포그라피 등, 말 그대로 대학생 수준의 작업이었다. K의 의도가 멋지게 빛을 발했다. 조금씩 나에게도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길러지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그것은 다가올 다음 작업에 대한 자신감으로 바뀌어 갔다.


작품보기 _ http://www.monrecit.com/insoos/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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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1 17:45 2008/07/11 17:45

[삶의 전쟁터에서] EP 3_6 둘째 아이가 태어나다. (AV Walker _ Boracay, Cebu, Manila)

2008/07/0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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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K와 내가 함께 하려던 이 계획은 K의 사정으로 인해 나 혼자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직은 편집디자인에 익숙하지 않으니 완전히 나에게 맡길 수는 없어서인지 K는 나와 함께할 파트너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하늘의 뜻이었는지, 광고회사에 다니던 A가 한 달간이라는 믿기지 않을 길이의 휴가를 받으면서 쉽게 해결되었다. A는 편집 분야의 경험은 부족했지만 스펀지 같은 흡수력과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력이 뛰어났다. 다양한 디자인 분야에서의 경험도 풍부해서 이번 작업의 파트너로 손색이 없었다. 이것을 제안한 때가 A의 휴가가 20일 정도 남았을 때였으므로 시간도 충분했다. 우리는 보름만 바짝 일하고 함께 놀러가자는 말로 그를 유혹했다. 물론 아르바이트 비용의 재빠른 결제(?)도 약속했고 말이다. 그는 예상 외로 쉽게 응해주었다. 나에겐 한 학번 후배이자, K와는 졸업동기였으니, 오랜 기간 쌓여온 서로간의 우정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A는 작업실에 와서 자기 자리를 셋팅했다. 며칠은 잘 흘러갔다. 디자인 작업도 잘풀리고 있었다. 문제는 더위. 이젠 열대야까지 나타나 우리를 괴롭혔으니 A는 특유의 조잘조잘 말투로 “이거 더워서 마우스 질이 안되네.” 나도 거들었다. “K사장, 우리 더위에 쓰러져 죽걸랑 서늘한 그늘에 뭍어줘. 절대 양지 바른 곳에 뭍으면 안돼.” K는 실실 웃더니. “알았어. 이 양반들! 에어컨 하나 업어올께” 우리는 모 광고 카피처럼 “시각이동에 에어컨 하나 놓아 드려야겠어요”와 같은 상황이었다. 등짝과 겨드랑이에서 땀이 샘솟을 뿐더러 남자들만 징그럽게 모여있다 보니 그 우중충한 분위기에 마우스 잡은 손이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했다. 수다를 떨 힘도 없고, 마우스를 쥔 손은 기력을 잃고, 모니터의 글자와 사진들은 하나, 둘 LCD에 눌러붙기 시작했다. 샤워효과는 딱 30분간 유효했다.

K는 곧바로 에어컨 수배에 나섰고, 중고매물로 나온 에어컨을 싼값에 들여놓았다. 처음 에어컨이 돌아가기 시작한 날은 작업 시작 5일째였다. 우리는 한동안 작업을 멈추고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는 온 몸이 오싹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오래된 에어컨에서 산다는 레지오넬라 균이나 잔뜩 쌓여있을 먼지들은 우리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 “우리 왔어요!”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몸 구석구석에 포진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것. 에어컨 설치 기념 중국집 짬뽕과 영화 한 편까지, 우리들은 망중한을 마음껏 누렸다.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1차시안까지 주어진 시간은 열흘이 채 안됐다. “젠장 무슨 주간 잡지도 아니고, 열흘만에 200P 작업을 다하나? 글줄을 주룩주룩 흘려 넣는 일반 단행본도 아니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모두 디자인해야 하는 이런 여행가이드 북을 어떻게 열흘만에 하란 소리야” A와 나는 투덜투덜, 재잘재잘, 웅성웅성 쓸데없는 얘기들을 하며, 그래도 분주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아무리 투덜대도 시간은 가고, 주어진 시간을 늘어나지 않는다. 시간 달라는 땡깡을 부리기 위해 1인시위를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 시간에 디자인에 대해서 얘기하면 퀄리티가 100배는 좋아지겠다.”라는 K의 말에, 순식간에 우리들은 철없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나의 헛소리에, “슈퍼맨 보고 잠깐 멈추게 하라고 시키지 뭐” 라며 더 말도 안되는 소리로 A가 받아쳤다. 서로 웃었다.

지난 작업의 포맷을 전체적으로 유지한다지만, 메인 칼라 선정과 Report, Special 페이지, 목차, 그리고 이 책만의 개성있는 요소들을 넣어야하고, 기타 크고 작은 부분들의 디자인이 빠뀌어야 하기 때문에 거의 새로운 책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쉬운 줄 알고 참여했던 A는 혀를 내둘렀다. “이거 약속이 틀리잖어” 하며 웃었다. K는 중간중간 디자인을 체크해주었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함께 논의 했고, 아이디어를 즉석에서 내기도 했다.

내가 맡은 부분은 보라카이와 세부였고, A는 마닐라와 보홀 부분을 맡았다. 앞의 목차와 인트로 부분, 뒤의 부록 부분도 내가 담당했다. 바이널 편집진은 몇 권의 단행본 제작 경험을 통해 쪽배열표와 함께 작업할 글과 사진을 잘 정리해주었고, 이는 우리들의 빠른 작업진행에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다. 쪽배열표에 나와있는 순서대로 글과 사진을 폴더 별로 정리하고 원고에는 단락에 붙어야할 사진파일까지 명시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Aqua측과 협의된 내용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디자인에 신경만 쓰면 되는 일이었기에, 작업을 하다가 발생할 수 있는 나타나는 여러가지 잡음이 적었다. 한마디로 작업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이미 앞서 두 권의 <AV Walker> 시리즈에서 서로들 노하우를 터득한 탓일까? 일사불란한 작업이었다.

주어진 날짜에 우린 작업을 완료했다. 1차 시안이 편집팀에게 넘겨졌고, A와 나는 탈진한 듯 목을 의자 뒤로 젖힌 채 뻗어있었다. 밤새도록 막판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얀종이 위 LP로 인쇄된 시안에 갈기갈기 긁혀져 있을 빨간펜의 압박을 기다리고 있었다. A와 나는 잠시 침실로 들어가 취침을 했다. 일주일 동안 죽도록 한 작업은 단 몇 시간만에 수정사항이 첨부되어 돌아온다. “불공평하다. 교열교정 작업도 한 일주일 걸려야지.” 하며 서로들 웃었다.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빨간펜을 상상하면 오산, 디자이너에게 빨간펜은 압박이다. 피흘리듯 쭉쭉 뻗은 빨간 흔적들은 무섭기까지 하다. 200여페이지의 시안은 바이널을 거쳐 Aqua를 거쳐 시각이동으로 돌아왔다. 취침을 하던 우리를 K가 깨웠고, 우리는 수정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2차, 3차에 걸쳐 수정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최종 시안은 실제 크기로 출력하여 가제본으로 만들기로 했다. 최종 수정 마지막 이틀은 Aqua에 있는 왕사장님과 부하직원이 와서 내 옆에 붙어 일일이 체크하고 수정했다. 막판에 쪽배열이 바뀌고, 챕터 순서가 바뀌고, 다수의 사진이 교체되었다. 한 사람이 200여 페이지를 모두 수정하는 것이 이만저만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힘을 내었다. 표지제목은 원래 <AV Walker _ Philippines>였지만, 나중엔 <AV Walker _ Boracay, Cebu, Manila>로 바뀌었다. 필리핀이란 이름보다 각각의 여행지 이름이 더 알기 쉽고, 대중에게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표지 포맷은 기존의 면분할 형식을 따라 적용되었고, 타이포그래피가 일부 바뀌는 정도로 변화를 주었다.
A는 보름 정도가 지나자 얼마 남지 않은 휴가를 아쉬워했다. 우린 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최종수정은 K와 내가 하기로 했다. 함께 피서 가자던 약속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는 우리를 이해해 주었다.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책은 그로부터 열흘 정도가 더 지난 후에 출간되었다. 나와 K, A 모두에게 좋은 추억이 될 만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책으로 나온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왜 이렇게 틀린 곳들이 많이 보일까? 내 머리를 자학하며 안타까워하면서도 난 그래도 그윽한 미소가 멈초질 않았다. 책장을 넘기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속에 베어 든 우리들의 땀과 노고,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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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웃음과 수다와 추억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난 또 한 걸음 나아갔고, 또 한 계단 발전했다. 책장에서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파리 오브 유어예> 옆에 나란히 <AV Walker>를 꽂아 놓으며, 한참 동안 그 곳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책과 내 마음이 닿아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때문이다. “이제 둘째가 태어났군” 난 혼자 중얼거렸다. 아이는 태어나면 힘들어지지만 작품은 태어나기까지가 힘들다. 하지만 태어난 후엔 영원히 내 곁을 따라다닌다. 내가 그것을 잊더라도 말이다.



작품링크 _ http://www.monrecit.com/insoos/881
다른후기 _ http://www.monrecit.com/insoos/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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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5 17:58 2008/07/05 17:58